또는

(구글 지도)


대마도가 원래 대한민국의 영토였음을 아시나요?

그리고, 6월 19일은 대마도의 날 입니다.

(일본 시마네 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한 것에 대응해서 창원시의회가 지난 2005년 조례로 정한 것 입니다.

 대마도의 날은 6월 19일이지만 조례를 제정한 3월 18일을 전후해 기념행사를 갖고 있습니다.)


대마도는 당일치기 일본 여행코스로 인기다 많은 섬입니다.

그 넓이가 자그만치 제주도와 비슷하고 구글지도에는 쓰시마섬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방문해보면 왠지 한국의 유적지 같은 곳들이 곳곳에 남아있고,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대마도 섬은 일본보다 한국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뿐만아니라 '대마도'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섬 같지 않은가요?


(아래는 작년 KTV 기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대마도에서 우리와 관련된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대마도에는 백제 의자왕 때 법묘스님이 세웠다는 수선사가 있습니다. 

 또, 대마도에 유배됐다 숨진 의병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순국비는 대마도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대마도 도주의 세손과 정략결혼한 덕혜옹주의 흔적도 있습니다. 

 이즈하라 항구 마을 가네이시조에 세워진 결혼봉축기념비는 슬픈 역사를 말해줍니다."


인터뷰> 박중철 위원장 / 대마도의날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삼국사기 심지어 일본서기에서도 대마국과 일본은 별개의 나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대마도는 본래 대한민국의 영토였습니다. 은근 슬쩍 왜 나라가 강탈해간 섬 입니다.

(요즘에는 독도도 빼앗아 가려고 끈질기게 교활하고 옹졸한 짓들을 하고 있죠)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근거들도 여럿 있습니다.




 아래는 대마도, 독도가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이다.

삼국접양지도에서 한국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만, 당시 영토 표시는 확실하다.

   조선 영토는 노란색, 일본 영토는 파란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도에서 보다시피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로 표현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울릉도와 독도도 조선의 영토로 표현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참고로 오래된 지도라고 해도, 일본어 판 지도는 신뢰성이 없다. 왜냐하면 일본의 자료들은 대부분 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노려서 일본이 취하는 최근의 꼼수로서는, 전세계 지도들에 전세계 언어로 조작된 정보를 등록하고 있는 것이다.

    쪽바리들이 믿는 신념 중에는 '거짓말을 오랫동안 계속하면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1832년 클라프로트 제작)





※ 아래는 조선팔도 지도이다.

이 지도는 일본 도호쿠대(東北大)에서 발견한 지도다.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표시되어 있고, 하야시 시헤이의 서명이 오른쪽 아래 있다.


(조선팔도지도)






과거 이승만 대통령도 끊임없이(무려 60여 차례) 일본 정부 및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 정부에게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6.25 발발과 함께 군수물자 보급로로 일본의 협조가 절실했으므로, 이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참고)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게 대바도 반환을 요구했었습니다.




참고1) 1750년대 조선 영조 시대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우리나라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중간은 잘록하고 아래는 퍼졌는데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확히 기재돼 있습니다.


참고2) 삼국시대에는 진도(津島)라고 불렸었으며, 고려 말까지 조세를 바치는 고려령이었다.

대마도에 진을 친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고려 창왕 2년인 1398년에 박위를 시켜 대마도를 토벌한 예도 있다.

세종 1년 1419년에 이종무도 대마도를 토벌해서 왜구의 뿌리를 뽑고 조선령임을 확실하게 굳혔다.






참고) 2011년 11월 월간조선 발췌


- 일본의 대마도 역사 왜곡과 6ㆍ25 전쟁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대마도가 한국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왜곡, 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오가사와라 분쟁 당시 활약했던 다나베는 1863년 초대 주불(駐佛) 일본대사가 된다. 7개월 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1867년 다시 주불대사가 된다. 이는 1868년 대마도의 일본 귀속을 앞두고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표기된 클라프로트의 지도를 수집, 폐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1897 ~1945)는 《근대 일본-조선관계의 연구(近代 日鮮關係の 硏究)》 등을 저술한 일본의 사학자이다. 일본인 사학자 하라다 사이에쿠(原田 榮)에 의하면, 그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하던 1923년 7월 일본인 사학자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와 함께 대마도 현지로 건너가서 한국 관련 문서 6만6469매, 고기록류 3576권, 고지도 36매, 고서류 18점, 그림 53점 등을 은폐하거나 태워버렸다고 한다. 

  

  다보하시의 《근대 일본-조선관계의 연구》는 1940년 출판됐으나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가 1970년 다시 발행됐다. 그는 이 논문에서 대마도가 일본에 귀속된 후의 대마도 관련사항을 전체 내용의 1/3 분량으로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대마도주(島主)가 일본의 명을 받아 조선과 접촉하였음을 은연중에 강조하여 일본의 속지(屬地)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보하시는 1928년 <이삭 틸싱크의 일본연구(Issac Titsinghの 日本硏究')>라는 논문도 썼다. 이삭 틸싱크(1745 ~1812)는 일본에 와 있던 네덜란드 의사이자 학자로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 원본 1부를 1806년 유럽으로 가져가 클라프로트에게 전해지도록 한 사람이다. 이는 다보하시가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기록된 <삼국접양지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요구를 한 데 대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접한 일본 정부의 반응은 위기감과 체념이었다고 한다(2008년 7월3일 일본 NHK 방영). 일본 정부는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에게 대마도 확보를 위해 필사적으로 로비를 했다고 한다. 

  

  1949년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펴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니 대마도는 당연히 일본령이라고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일본은 1950년 1월 17일에는 500만 달러를 투입하는 대마도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2일 후에는 일본 수상이 히로히토 천황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6·25가 터지면서 상황은 반전(反轉)됐다. 국가존망의 전쟁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대마도의 날'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의 것을 찾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 강력하게 요구를 해야 합니다. 일본인들의 특징이 있지요. 강한 상대에게는 굽신 굽신, 약한 상대에게는 저돌적입니다. 일본 정부의 부당한 주장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아울러 며칠 전 강경화 외교 장관님이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문제로서 국제사회에 알리겠다는 의지에 적극 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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